얼마 전 12년차 직장인 S(40·서울)씨는 자기가 다니는 회사의 은행 예금이 1조원대라는 얘기를 듣고 화가 났다. S씨 연봉은 3년째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가계 사정은 점점 나빠지고 있는데, 회사엔 몇 년째 현금이 쌓여만 가고 있기 때문이다. S씨가 매달 받는 월급은 350만~400만원 수준. 생활비와 주택담보대출 이자, 부모님 용돈, 초등학교 2학년 자녀의 교육비 등을 대고 나면 늘 적자다.
이 때문에 빚은 자꾸 늘고 있다. 최근 만기가 도래한 주택담보대출 중 일부는 다른 은행의 주택담보대출을 빌려 막았다. 이 과정에서 이자는 월 5만원, 대출액은 1000만원 늘어났다. 지난해 초까지 100만원 안팎에 머물던 월급통장 잔액은 최근 마이너스 800만원으로 적자폭이 늘었다. S씨는 "회사는 돈을 많이 버는데, 직원들 살림살이는 계속 뒷걸음질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기업은 점점 부자(富者)가 되는데, 직원(가계)은 점점 가난해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기업들이 이익을 내면 재투자 등을 통해 국민들에게 돈이 돌아가야 하는데, 벌어들인 돈을 쌓아만 놓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가계의 소비 여력이 점점 줄어 서민 경제의 장기적 성장잠재력이 훼손되고, 빈부 격차가 더 커질 수 있다"고 염려한다.
지난해 말 기업들이 은행에 저축한 현금성 자산은 총 215조원. 우리나라 GDP(국내총생산)의 21%에 이른다. 2008년의 177조원보다 약 38조원(21%)이나 늘어났다. 이는 2000년(26.9%) 이후 최대 증가 폭이고, 증가 금액으로는 사상 최대다. 기업들의 은행 예금은 2004년 이후 2005년 14조2000억원, 2006년 11조8000억원, 2008년 14조3000억원 등 거의 매년 10조원 이상 벌어들인 현금을 쌓아놓고 있다.
기업들은 "불안한 경기 전망 때문에 (불황에 대비해) 현금 보유량을 늘리고 있을 뿐", "차세대 사업을 발굴할 수 있는 결정적인 투자 찬스가 오면 쓰려고 실탄을 쌓고 있다"고들 설명한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신빙성이 낮다. 지난해 기업들이 예금한 215조원 중 85%에 달하는 183조원이 만기 1년 이상의 저축성예금(정기예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A시중은행 기업고객담당 임원은 "정기예금은 중간에 해지하면 원래 이자의 절반도 못 받는데, 어떤 간 큰 자금 담당자가 곧 쓸 현금을 정기예금에 넣겠느냐"면서 "기업들이 정기예금에 넣은 돈은 앞으로 1~2년 내에는 쓰지 않을 돈이라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들이 벌어들인 돈을 고용 창출과 임금 인상 등을 통해 국민에게 돌려줄 생각은 접고, 은행에 몇년씩 맡겨 이자 놀이를 하고 있다는 얘기다. 기업들의 정기예금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몰아친 2009년 사이에 23%나 증가했다. 경기가 좋았던 2006년의 8.8%, 2008년의 10.9%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기업들이 좋은 실적을 내 유동성을 크게 확보한 것은 긍정적인 일이지만, 현금을 재투자 않고 저축한다는 것은 한국 경제의 중·장기적인 성장 관점에서 부정적인 측면이 크다"고 말했다.
◆'부자 나라'의 '가난한 국민'
기업들이 돈을 많이 벌면 GDP(국내총생산)가 늘어나 국가도 '부자 나라'가 된다. 하지만 불어난 자본이 기업 등에 축적되기만 하면 국민들은 풍요로운 소비를 하기 힘들어진다. '부자나라의 가난한 국민'이 되는 셈이다.
지난해 전국 가구의 평균 소득은 4131만원으로 2008년의 4071만원보다 1.5% 늘어나는 데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해 물가상승률(2.8%)에도 못 미치는 수치로, 소득증가율에서 물가상승률을 뺀 실질 소득 증가율은 마이너스 1.3%다. 사실상 소득이 줄어든 셈이다.
특히 정규직은 줄고, 비정규직이 늘면서 실질적인 소득 감소 현상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전체 근로자의 월평균 임금은 1년 전과 비교해 0.3%가량 늘었지만, 비정규직의 월평균 임금은 오히려 7%가량 줄었다.
이러니 빚이 늘어나고, 적자 살림이 날 수밖에 없다. 지난해 말 가구당 부채(가계신용기준)는 4337만원으로 전년 말의 4128만원보다 5.1% 증가했다. 가구당 소득에서 부채를 빼면 마이너스 206만원이다. 일년 내내 벌어서 빚도 못 갚는다는 얘기다. 자연히 저축할 여유가 없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는 올해 한국의 저축률(저축액을 소득으로 나눈 것)을 30개 회원국 중 꼴찌인 3.2%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관계자는 "기업들은 투자와 고용 확대와 적정한 임금 인상 등을 통해 이익금을 국민 경제에 돌려줘야 한다"면서 "벌어들인 돈을 쓰지 않고 쌓아놓기만 하면 고용 감소, 소비 침체, 경제의 활력 저하를 거쳐 다시 고용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상황이 1998 ~2002년 사이에 일본 경제가 겪은 현상과 비슷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당시 일본 기업들은 이른바 '주주자본주의' 바람에 편승, 기업 가치를 높인다는 이유로 벌어들인 돈을 재투자하기보다 내부 유보하거나 주주배당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LG경제연구원 이지평 수석연구원은 "이 때문에 일본에선 비정규직이 늘고, 중산층 이하 근로자들의 실질 소득이 줄어들면서 일본 경제의 장기 불황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말했다.
[정철환 기자 plomat@chosun.com ]
조선일보가 위치를 잡으려고 안간힘 쓰는군뇨. 약먹었냐는 소리까지 들으면서 말이죠 ㅋ
근데 그게 과연 잘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