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자동차 파업, 그 후⑪] 제 꼬리를 씹어 먹은 대한민국, 그리고 쌍용차 (프레시안)
2009년 8월 6일,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77일간의 옥쇄 파업을 마치고 공장 문을 나섰다. 직접적으로는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의 여파로 시작된 자동차산업의 구조조정, 더 원인을 파고 들어가면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된 해외자본의 국내기업 인수의 예고된 비극, 노동자 입장에서 따지면 한국사회에 깊게 뿌리 내린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성에 낳은 칼바람이었던 쌍용차 사태는 한국사회에서 큰 상징성을 갖고 있다. 그로부터 200여 일이 지난 지금 파업 참가 노동자들은, 쌍용 공장은, 그리고 우리 사회는 어디쯤에 서 있는 것일까?
미행(美行)과 쌍용 파업 참여 노동자, 가족들 그리고 금속노조를 비롯한 다양한 노동, 정치, 사회 단체들과 현장 활동가, 르포작가, 교수, 작가, 블로거 등 다양한 사람들이 각각의 관점에서 오늘을 진단해본다. "파업 그 후"부터 "88만원 세대와 쌍용"을 거쳐, "한국 사회와 노동자 파업"에 이르기까지 그들과 우리가 처한 오늘을 기록한다. 편집자
개인적인 고백을 하자면 나는 90년대의 문화적 조류에서 사춘기를 보낸 사람이다. 자유주의적 주체, 냉소주의적 주체에, 세상을 '노동자'의 눈으로 바라보기보다 경영의 논리로 생각하는 게 더 익숙한 사람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 같은 놈이 '좌파'라고 불리게 된 이놈의 세상과 시대가 진짜로 웃기고 자빠졌다고 내내 생각해 왔다. 지금까지 그런 말을 굳이 안 한 것은, 호칭이야 부르는 놈들 마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나는 좌파가 아니야!!!"라고 외치는 게 '진짜 좌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늘 이런 말을 서두에 꺼낸 건 세대론과 쌍용자동차 투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어떤 것인지를 미리 고지하기 위함이다.
'88만 원 세대론'이란 게 한국 사회에 폭풍의 떡밥처럼 투척된 지도 어언 3년이 흘렀다. 젊은이들의 대다수가 88만 원을 받고 살게 될 거라는 묵시론의 예언에 맞서 <조선일보>는 우리의 젊은 글로벌 세대들이 세계를 제패할 것이라는 'G세대론'을 내세웠다. 그러는 사이 3-40대들은 20대가 투표를 안 해서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라고 개탄했고 20대들은 사회를 이렇게 만든 게 모두 당신들인데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버럭 성질을 냈다. 세대론이 계급문제를 은폐하고 우익들에게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담론이라는 좌파들의 개탄이 있었고, 세대불평등이 통계자료에 유의미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어느 사회학자의 타당한 지적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 취업 컨설턴트들은 '취업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환기시키기 위해 '88만 원 세대론'을 써먹었고 당사자 운동이란 걸 만들어보려는 극소수의 20대들은 암중모색 속에서 시행착오를 겪었다.
'88만 원 세대론'의 본질을 무어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담론이 애초부터 중간계급을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 담론의 시선은 '원래부터 88만 원 정도를 벌었던 젊은이들'에게 가 있지 않다. 그 시선은 저 묵시론적 예언을 듣고 '혹시 나도 88만 원 정도를 벌게 될지도 모른다고 불안감을 느끼게 된 젊은이들'을 향한다. 그런 젊은이들의 불안감이 <88만 원 세대>를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그 불안감은 한국 사회의 불평등을 온전히 대변하지 않으며, 더구나 '미래'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러므로 '세대불평등'이란 것이 통계자료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즉 이들의 불안감이 폭로하는 사회문제는 어떤 진보적인 가치지향에서 잡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 불안감이 던지는 질문은 "한국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체제를 재생산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한국의 중산층은 부동산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을 통해 자산을 축적하면서, 그렇게 해서 훼손된 기업의 경쟁력을 신규 노동시장에 진입한 이들의 임금을 낮추면서 보충해왔다. '집값'은 높이고 '사람값'은 낮추는 체제를 운용해온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 체제를 지지해왔던 그들 중산층의 자녀조차 자신의 월급으론 독립을 꿈꾸지 못하게 된 '멋진 신세계'다. 신나게 날다가 되돌아와 던진 사람의 뒷통수를 치는 부메랑이다.
어찌 이 문제만이겠는가.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을 때 경악스러운 이유는 삼성의 부도덕성이나 뻔뻔스러움 때문만은 아니다. 냉소주의와 경영논리에 찌든 눈은 다른 지점을 바라본다. 삼성이란 조직이 운용되는 방식이 이 기업의 지속적인 생존가능성에 대해 드리우는 짙은 그림자가 걸리는 것이다. 이건희는 이미 중년의 나이에 들어선 아들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복귀했다. 삼성이 위기라는 이건희의 주장은 경제신문들의 '건비어천가'가 아니더라도 옳다. 하지만 이건희라고 해서 영원히 살 수 있단 말인가. 핸드폰을 애플보다 열 배는 더 많이 팔면서도 수익은 그만큼 올리지 못하는 삼성, 비자금 관리자를 기술개발자보다 우대하는 삼성의 경영방식은 가격경쟁력을 위한 노동자의 희생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저임금 노동자에 길들여진 이 '초일류기업'이 노동자를 백혈병으로 죽이면서 세계를 호령하는 일은 얼마나 더 가능할까. 한국의 지배계급이 정말로 '삼성의 몰락=대한민국의 멸망'이란 등식을 믿는다면 지금은 '지속가능한 삼성'을 위해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저 재벌총수를 설득할 때다. 하지만 소위 '보수진영'에선 이건희를 비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 한국 자본주의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세대문제의 핵심이다. 한국경제를 주도하는 장년세대는 자신들이 이룩한 산업화의 성과에 뿌듯함을 느끼며, 자식세대가 그것을 무한히 존경해 주길 바란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현실은 그네들의 자녀들이 자식가지는 것을 꿈꾸지 못하는 '출산파업'의 현실이다ⓒ프레시안(여정민) |
'대한민국의 멸망'을 피하기 위해선 누군가 문제를 직시해야 하지만 뱀은 우물 바깥을 보지 않고 빙그르르 돌아서 자기 꼬리를 문다. 탐욕스러운 뱀은 날카로운 이빨로 자신의 꼬리를 잘라내어 집어삼킨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의 희생을 기반으로 한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란 뱀의 꼬리였다. 정규직 노동자의 가장 약한 고리였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외면하고 사회문제를 외면하면 자신들만은 살 줄 알았던 그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해고됐다. 이들의 투쟁을 외면하면 우리는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노동자들을 잘라내고 기업의 안녕을 도모하는 기업들은 그렇게 '제 살 깎아먹기'에 몰두하다가 나중에 물건은 누구에게 팔아먹을 생각일까? 대한민국의 기업들은 오로지 수출만으로 먹고 살면서, 제 나라 노동자들을 끝없이 착취할 자신이 있는 걸까? 박리다매로 글로벌 기업이 된 위대한 삼성조차 100% 내수인 금융으로 수조원의 이익을 내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데 말이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미래를 모르는 탐욕스러운 뱀의 꼬리에 위치했다면, 88만 원 세대는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에서 대한민국의 현실이 드러날 게다. 88만 원 세대가 쌍용자동차 투쟁과 만나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쌍용의 노동자들이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애저녁에 포기한 것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용안정을 보장받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라는 것은 젊은이들의 상상 속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들이 선망하는 대기업에 다니는 젊은이들 중 대다수가 돈이 조금 모이면 그 기업에서 나와 자기 사업을 하는 것을 꿈꾼다. 특히 여성 노동자들은 정년까지 일하리란 꿈을 꾸지 못한다. 안 그래도 자영업자 비율이 높은 한국 사회에 이 친구들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좌파만의 의무'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던지면 '좌파'라는 힐난을 듣게 된다.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보라는 소리를 듣는다. "좌파는 성선설(性善說)을 믿으니 문제"라던 사람들이 한편으로 말하는 것이 저 '따뜻한 마음'이다. 사실 내 안에서 그런 반응에 조소하는 큰 부분은 좌파적 감수성이기는커녕 냉소주의와 경영의 논리다. 국방력 강화에 큰 관심이 있었던 전직 대통령은 북한 땅을 중국에 갖다 바치려는 수준의 철딱서니 없는 '보수'들에게 '좌파'로 매도당했는데, 사실 그는 '노동자'의 시선을 보여주기는커녕 쌍용차에 투자하겠다는 상하이차 자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자본가의 '선량한 마음'을 신뢰했다. 쌍용차의 현재 상황에 치를 떠는 감수성 역시 생활터전을 뺏긴 노동자를 챙긴다는 진보의 논리 이전에 '매각'을 잘못한 경영진의 '착한 마음'에 대한 냉소에서 나온다. 그 선량한 사람들의 순진한 행동 속에서, 일자리를 뺏긴 사람들은 '악'이 받칠 수밖에 없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뺏긴 것은,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이 처음부터 가지고자 욕망하지도 못하는 것들이다. ⓒ프레시안(손문상) |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하는가? 누구들이 힘을 합쳐야 이런 문제를 끝낼 수 있나? 세대론이 옳으냐 계급론이 옳으냐와 같은 문제제기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어떻게'에 대한 이러한 물음일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음에 뾰족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 '현실'은, 그 자체로 우리의 출발점이다. 세대담론은 물질적으로나, 담론적으로나, 계급문제가 철저하게 정치에서 배제된 결과로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담론이다. 그리하여 '계급의 문제'를 넘어서기에 더 쉬운 연대가 가능할 거라고 역설하지만, 실은 노동계급이 얼마나 가진 것이 없는지를, 그들의 투쟁의 출발선이 얼마나 뒤로 물려져 있고 그래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폭로하는 담론이다.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이 거세당한 욕망을 권리로 인지하고, 그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이들과 연대하는 세상은 지금으로선 그 자체가 하나의 꿈이다. 그렇게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고립'은 투쟁의 성공이 아니라 투쟁 자체가 꿈이 되어버린 세태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꼬리를 씹어 먹은 뱀의 머리는 계속해서 자신의 신체를 잠식할 것이다. 미래는 없지만, 그들에게 다른 방법은 고려되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가 불행해지더라도 지금까지 그랬듯 우리 모두 아등바등 살면서 뱀 머리의 특권을 유지시켜 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결국 모든 이가 공평하게 욕망을 거세당한 사회를 받아들일 것인가? 그런 결말을 피하고 싶다면 우리가 포기한 부분들, 우리의 몸에서 잘려나간 부분들을 응시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쌍용자동차는 하나의 시작일 뿐이며, 문제를 대면하고서야 투쟁에 나서는 습속을 반복할 때, 노동운동과 젊은이들은 영영 서로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 채 둘 다 패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윤형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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