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N&M&C&D]
09.04.06 <b:무엇을 할 것인가?>
달로 간 사내
2009. 4. 6. 02:56
무엇을 할 것인가? What is to be done? : Leninism, anti-Leninist Marxism and the question of revolution today
(위너 본펠드| 조정환 역| 갈무리| 2004.02.22)
요즘 보고 있는 책!
한동안 총학생회 생활을 겉돌면서... 이래저래 고민이 많았는데...
그런 시기를 정리하게끔 도와준 책!
아직 책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암튼 여튼 이번주내로 꼭 다 읽어야지...
후기는 그 이후에 다시 올리겠음

책 소개 |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을 따르던 모든 이들이 간직했던 '혁명의 교과서',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글을 모은 이 책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자, 새롭게 제기되(어야 할)는 혁명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특히 레닌주의가 실패한 이유과 반레닌주의의 모습을 살펴본 뒤, 그것들의 장단점
을 융합한\ 자세는 높이 평가할 만 하다.
저자들은 볼셰비즘적 역사관인 레닌주의의 마르크스주의 계승설을 부정하면서 논의를
행한다. 그들에 따르면 레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정신에서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특징일 뿐이다. 레닌의 사상이 곧 새로운 중앙집중주의, 곧 부르주아 독재로 이어졌다는
역사적 사실이 반증이 될듯하다. 이러한 비판 뒤에 저자들이 찾아낸, 새로운 혁명의 모습은
지난 1994년 봉기한 멕시코 농민 혁명군인 사타티스타이다. 다중의 자치 그리고 자치의
확장을 통해 공동화된 국가권력을 구축하고 아래로부터의 변혁을 지향하는 그들의
모습이야말로 올바른 혁명전략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로서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며 끊임없는
답을 추구하고 있다.
사빠띠스따 봉기 십 주년에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백 년 역사를 되짚어본다.
1994년 1월 1일에 멕시코 남부 치아빠스 라깡도나 정글에서 터져 나온 ‘사빠띠스따 봉기’
만큼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절실하게 되새기도록 하는 것이 있을까? 봉기
십 주년에 즈음하여 출간되는 이 책은 이제 21세기 초에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문제
를, 혁명의 문제를 다시 제기한다.
고전적 혁명 주체로서의 레닌주의적 주체가 붕괴한 상황에서 혁명적 행동을 개시하여
10년이 넘은 투쟁을 지속하고 있는 사빠띠스따 사건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하며 영감을
제공한다.
“레닌주의적 주체의 위기는 이론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 문제이기도 하다. 우선
그것은 역사적 문제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상황과 현재의 ‘힘들의 균형’을 특징짓는
사건
들 중의 하나는 ‘레닌주의에 의해 영감을 얻은 혁명’의 패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이
론적 문제이다. 왜냐하면 레닌주의와 결부된 주체 개념과 계급투쟁 개념은 이러한 실패의
일부이기 때문이다.”(285~286쪽)
“홀러웨이는 사빠띠스따 경험에서 혁명의 긴급성을, 그러나 더욱 중요하게는, 혁명이
지금까지 사유되고 상상된 고전적 원칙을 깨뜨리면서 그것을 재창안할 필요를 요청하는
열망을 발견한다. 이 작품들의 가장 커다란 기여들 중의 하나는, 그것들이 범주들을,
특히 혁명적 주체의 범주를 확장할 필요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사빠띠스따
운동이 적어도 잠재적으로 표현하는 이념을 확장할 필요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285쪽)
20세기를 이끈 레닌과 뜨로쯔끼의 혁명사상을
전면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재검토한다.
전 지구를 가로지르는 반자본주의 운동이 한창 소생하는 가운데 2002년이, 레닌이
1912년 『무엇을 할 것인가?』를 쓴 지 백 주년이 되는 해라는 사실은 거의 주목받지
못한 채 지나가 버렸지만, 이 책 『무엇을 할 것인가?』는 레닌의 혁명사상을 전면적이고
비판적으로 재검토하여 혁명정당에 초점을 맞추는 혁명적 기획들을 반성한다.
러시아 혁명의 비극은 단지 지도력의 문제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지도자로
부터 권력을 이어 받은 나쁜 지도자에 의해 야기된 비극이 아니다. 뜨로쯔끼가 레닌을
계승했고 그의 지도력이 훌륭하다고 가정할지라도 러시아 혁명을 강제 노동 수용소라는
절망의 지하 감옥에서 구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혁명을 당의 지도력과 등치시키는
것은, 당이 혁명의 이름으로 대중에 대해 가장 엄격한 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용가능한
모든 방법들과 수단들을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의 수단으로서
국가권력이 장악되어야 한다는 레닌주의적 신화에 숨어서 말이다.
“혁명의 이론과 실천은 레닌주의의 유산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
, 그리고 ‘무엇을 다르게 할 것인가?’ 등을 의미해야 한다.”(30쪽)
“혁명조직을 당 형태로 보는 레닌주의의 생각과, 혁명의 도구로서 국가권력이 장악되어
야한다는 레닌주의의 국가관은 도전받지 않은 채 남아있다. 혁명이라고 하면 이제까지
레닌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지금 뜨로쯔끼주의라는 온건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 오늘날 혁명정당을 혁명의 조직형식으로 칭송하는 사람들은,
레닌주의의 도그마 뒤에 숨어서, 스딸린에 의해 이루어진 사회주의의 ‘왜곡’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하여 레닌주의를 정화하고 그것의 신화를 보존한다.”(28쪽)
“레닌의 이름은 ‘맑스레닌주의’ 이론의 공동 창설자로서 맑스의 이름과 짝을 이루어
왔다. 하지만, 혁명이론의 역할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의 발전에 대한
레닌의 독창적인 이론적 기여는 아주 제한적이었다. 그의 재능은 체르니쉐프스키의
인민주의적 전통에 속해 있는 결연한 혁명가, 탁월한 선전선동가이자 정치적
조직가라는 데 있었다. … 이 논문에서 내가 논증하고 싶은 것은 레닌이 결코 러시아
인민주의의 이론적, 정치적 전통과 단절하지 않았으며, 맑스주의를 인민주의라는 매우
다른 이론적 틀거리와 동화시킴으로써 플레하노프의 기획을 완성시켰다는 것이다.”
(101~10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