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5·18’ 없고 ‘6·25’ 있다
[아침신문 솎아보기] 광주 민주항쟁 30주년 언론의 기록 (미디어오늘)
견제 받지 않은 권력은 오만과 부패의 독버섯이 자라날 수밖에 없다. 30년 전 그날도 그랬다. 신군부는 힘의 우위를 과신한 나머지 총칼로 민중의 함성을 잠재울 수 있다고 믿었다. 1980년 5월18일 광주의 핏빛 기억은 그렇게 시작됐다.
광주 민주항쟁이 벌써 30주년이 됐다. “세계 민주주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시민 저항의 승리(동아일보 2010년 5월18일자 사설 중 일부).” 30년이 지난 후 언론은 이렇게 평가했다. 한국 현대사의 빼놓을 수 없는 상처이자 그 자체로 역사인 5.18을 올바르게 기록하고 후대에 전하는 일은 언론이 해야 할 의무이자 책임이다.
한국 언론은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을까. 아니면 30년 전 그날, 광주를 전할 때 ‘폭도’라는 표현을 사용하던 그 ‘곡필’로 다시 국민의 눈을 속이려 하고 있을까. 2010년 5월18일자 주요 아침신문을 무거운 마음으로 탐독해야 할 이유이다.
다음은 18일자 전국단위 아침신문 1면 기사다.
경향신문 <"한국인 표현의 자유 촛불 이후 상당히 위축">
국민일보 <안보리 의장에 서한 발송검토>
동아일보 <"북소행 단서, 어뢰 스크루 파편 확보"> 서울신문 <정부 "천안함 북 소행" EU·중·일에 전달했다>
세계일보 <안보리 의장에 서한 검토>
조선일보 <'어뢰 프로펠러' 파편 찾았다> 중앙일보 <MB '김정일 책임' 직접 거론 가능성>
한겨레 <인도적 대북지원도 '차단'>
한국일보 <"방어 위주 국방전략 탈피 필요">
올해 5·18은 30주년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갖지만, 어느 해보다 외면을 받고 있다. 5·18은 시민사회의 오랜 노력 끝에 국가 기념행사로 자리를 잡았다.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님을 위한 행진곡’을 소리 높여 부르는 모습이 TV화면에 전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이명박 대통령은 5·18 30주년 기념식이라는 이 특별한 행사에 참석하지 않는다. 외교 일정이 바쁘다는 이유이다.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28주년도 아니고 29주년도 아니고 30주년인데 그런 의미 있는 날에는 대통령이 참석해주는 게 5·18 30주년의 의미를 더하는 날이라는 점을 청와대가 모를 리 없다.
올해 5·18은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않는다. 경향신문은 1면 <5월 그날을 기억하라!…광주항쟁 30년 빗속의 전야제>라는 기사에서 “5·18유족회 등 3개 5월단체 대표들은 정부가 기념식 본행사에 그동안 추모곡으로 불러 온 '임을 위한 행진곡'을 2년째 제외한데 항의, 기념식에 불참키로 했다”고 보도했다.
'님을위한 행진곡' 대신 '방아타령'
▲ 한겨레 5월18일자 12면.
한겨레는 12면 <5·18 기념식에 때 아닌 '방아 타령'>이라는 기사에서 “오월 영령들을 추모하고 오월 정신 계승을 다짐하는 국립 5·18민주묘지에 때 아닌 경기민요 '방아타령'이 울려 퍼지게 됐다”고 전했다.
이명박 정부가 ‘5월 광주’를 대하는 모습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천안함 사건을 6월 지방선거 직전까지 최대한 정치적으로 활용하겠다는 ‘타임스케줄’을 잡는 그런 ‘비상한 머리’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5월 광주’를 홀대하고 있다는 얘기는 적어도 나오지 않도록 하는 관심과 배려가 필요할 뿐이다.
정부 외면과 달리 주요 아침신문은 5월18일자 지면에 광주 민주항쟁 30주년과 관련한 다채로운 기획을 전했다. 1면 사진기사로 5·18 관련 소식을 전하면서 남다른 의미를 찾고자 했다. 한겨레는 1면에 <'5월의 얼굴'을 기억하십니까?>라는 제목으로 30년 전 수배전단 속 5·18을 되새겼다. 한겨레는 <30년 울부짖은 어머니의 손길>이라는 제목의 사진 기사를 싣기도 했다.
한겨레는 8면 <신군부 맞선 청춘들, 죄없는 도망자로 내몰려>, 9면 <원했던 세상 요원한데…5·18은 추억일 뿐인가>, 10면 <"지금은 '촛불·투표'로라도 국가폭력에 맞설 시대">, 11면 <"슬픔의 기억 넘어 '광주의 진정성' 일상화해야"(소설가 황석영 기고)> 등 특집 기사를 8면부터 11면에 걸쳐 내보내기도 했다.
주요신문 1면, 5·18 사진 기사
▲ 동아일보 5월18일자 1면.
▲ 한국일보 5월18일자 1면.
주요 아침신문 1면 사진도 절반 이상이 5월 광주에 대한 내용이었다. 경향신문, 동아일보, 세계일보, 한겨레, 한국일보 등이 1면 사진기사로 내보냈다. 동아일보는 1면에 <오늘 5·18민주화운동 30돌…마르지 않는 눈물>이라는 사진 기사를 실었고, 한겨레도 <30년 울부짖은 어머니의 손길>이라는 제목의 사진 기사를 1면에 실었다.
한국일보는 1면 <5·18 30주년…눈물 아직도>라는 1면 사진기사에서 “민주주의 제단에 자식을 바친 어미의 가슴엔 아직도 쏟아 내지 못한 회한이 남았다. 5·18민주화운동 30주년을 하루 앞둔 17일 광주 운정동 5.18국립묘지를 찾은 한 어머니가 묘비 앞에서 오열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앙일보는 18면과 19면에 걸쳐 ‘2010 연중기획-광주항쟁 30년’의 일환으로 <역사의 한을 넘어 미래로…5·18둥이들 화해·약속·희망의 내일을 말하다>라는 기획기사를 내보냈다. 세계일보도 7면에 <민주·인권·평화 숭고한 '광주 정신' 되살렸다>라는 기획기사를 전면을 털어 내보냈다.
동아일보 "다른 신문 '무장폭도'로 매도, 동아는 신군부 요구 거부"
▲ 동아일보 5월18일자 10면.
동아일보는 1980년 5월 광주를 전했던 당시 동아일보 모습을 생생한 기사로 담아 냈다. 동아일보는 10면 <군 검열에 저항 5일간 사설-만평 안실어>라는 기사에서 “토요일인 1980년 5월17일 오후 4시 동아일보 사회부 김충근 기자는 '광주가 심상치 않으니 서둘러 내려가 취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면서 “다른 신문이 '무장폭도' '난동' 등의 표현으로 광주시민을 매도할 때 동아일보는 '데모대' '시위' '소요'등의 단어로 신군부의 요구를 거부했다”고 설명했다.
동아일보는 이날 <5·18 미래지향적 승화의 길>이라는 사설에서도 “동아일보는 19일부터 23일까지 사설란을 아예 없앤 무사설로 광주의 저항에 힘을 실었다. 신군부의 압박을 받고 집필해 계엄당국의 검열을 거친 관제 사설을 싣지 않기 위해서다”라고 설명했다.
주요 아침신문 대부분이 1면 사진 기사나 기획기사 등으로 5·18 30주년 의미를 되새긴 것과 흐름을 달리한 신문도 있다. 바로 조선일보이다. 1980년 5월 광주를 전할 때 ‘원죄’가 있기 때문일까. 조선일보 2010년 5월18일자 지면에는 5·18은 없고 6·25는 있다.
5·18 30주년, 6·25 기획기사 내보낸 조선일보
▲ 조선일보 5월18일자 6면.
더 정확히 말하면 5·18 관련해 특별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기사는 없었다. 조선일보는 이날 1면에 5꼭지 기사를 실었는데 3꼭지가 북한 관련 기사였다. 1면 사진 기사는 태국유혈사태 기사였다. 동아일보가 5.18 30주년 의미를 담은 1면 사진 기사를 내보낸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5·18 관련 기획기사를 싣지 않았던 조선일보는 6·25와 관련한 기획기사는 내보냈다. 조선일보는 6면 ‘6·25 60주년 나와 6·25’라는 기획의 일환으로 <미 첩부기관 켈로부대장 '최규봉씨의 6·25'>라는 전면 기획기사를 실었다. 조선일보 기사는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나는 광복 직후 김성 장군이 창설한 반공 지하단체 '양호단'에 입단했다…”라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조선일보의 5·18 관련 기사는 12면 하단에 <30년처럼 타오른 '민주의 횃불'...광주 5.18 전야제>라는 기사 정도이다. 조선일보는 5·18 관련 사설을 실었다. 그러나 주장은 다른 언론과 비교할 때 엉뚱한 내용이었다.
조선일보는 <5·18민주화운동 30주년과 한국민주주의>라는 사설에서 “5·18이 과거의 특정 시간과 특정 지역의 틀에 갇혀 있어선 안 된다. 무엇보다 1980년의 광주는 세계 최악의 인권탄압국이자 가장 잔혹하고 비민주적인 북한 체제에서 신음하는 북한 주민들의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비전으로 자리 잡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0년 5월 광주 의미를 북한 인권탄압을 해소하는 비전으로 삼자는 주장은 2010년 5월18일자 신문 중 조선일보가 유일하다. 동아일보는 이날 사설에서 “1980년 신군부의 정권 장악 음모에 맞서 일어난 5·18민주화운동이 서른 돌을 맞았다”면서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시민 저항의 승리였다”고 평가했다.
서울신문은 이날 사설에서 “5·18은 전 세계에서 아시아의 대표적인 인권운동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국내에서의 평가는 여전히 인색한 형편”이라며 “문제는 민초들이다. 신군부 핵심인사들은 사면복권 뒤 원로 대접을 받으며 활동 중이다. 반면 다수의 피해자, 유가족들은 아직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고 우려했다.
한국일보도 이날 사설을 통해 “이때 확인된 시민사회 일반의 민주적 역량은 1980년대 말과 199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에 민주화 시대를 확고히 열게 한 원동력이 됐다”고 평가했다.
"30년 전 역사를 위한 희생과 공동체의 꿈"
▲ 경향신문 5월18일자 35면.
정근식 서울대 교수는 35면 <5·18민주항쟁 30주년에 부쳐>라는 칼럼에서 “모두가 합리성과 경쟁을 내세우면서 실은 조그마한 이익에 탐닉하는 '속물사회'가 되어 버린 현실에서, 과연 30년 전의 역사를 위한 희생과 공동체의 꿈은 어떻게 우리에게 돌아올 것인가”라고 한국사회가 함께 고민할 과제를 던졌다.
광주 민주항쟁 30주년 기념일 조선일보 지면은 다른 신문과 달랐다 한국전쟁 60주년 의미를 되새기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5월 광주 30주년을 기념하는 날이라면 관련 기획기사를 준비하는 게 합당한 모습 아닐까.
여전히 많은 사람은 조선일보의 ‘5월 광주’ 당시 보도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 왜 광주 시민들을 ‘폭도’라고 불렀는지, 왜 그런 보도를 했는지, 그것이 지금도 ‘진실’이라고 보는지, 30년이 지난 지금 조선일보의 그날을 되돌아보는 기획기사가 나왔다면 훨씬 의미 있는 지면이 되지 않았을까.